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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나보레 (루이나)/역사)] 나보레는 중세 이래 벨포르 서쪽의 평야에 흩어진 농촌과 작은 시장 마을이었다. 왕실 직할지로서 왕도 벨포르에 보리와 채소, 양모를 대는 곡창 노릇을 했으며, 해안의 웨스트포트에는 작은 어항이 있었다. 19세기 후반 벨포르 중앙역에서 서쪽으로 뻗은 철도가 놓이면서 벨포르의 공장 노동자들이 나보레에 집을 구하기 시작했고, 1885년 공화국 수립과 함께 나보레 시가 되었다. 1891년에는 [[나보레 경찰국]]이 창설되었다. 나보레가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공공주택 덕분이다. 1920년대 나보레 주택공사가 첫 노동자 임대주택 단지를 지었고, 대공황기에는 공공사업으로 단지가 크게 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주택난이 극심해지자, 나보레 주택공사와 국가가 나보레의 넓은 평야에 공공임대 아파트를 대규모로 짓기 시작했다. 1950년대에는 국민주택공사가 합류해 나보레에 주택부재공장을 세우고 국가 표준설계에 따른 패널 아파트를 공장에서 찍어 내듯 지었다. 1957년 [[나보레 사태]]가 일어났다. 1954년 중앙대법원이 출신 지역이나 민족을 이유로 학생을 분리할 수 없다고 판결하자, 동양계 학생 11명이 백인 중심 학교였던 나보레 센트럴 고등학교에 입학하려 했다. 당시 시장 에드몽 L. 바르비에가 시방위군으로 학교를 봉쇄하자, 대통령은 시방위군의 지휘권을 회수하고 606 공수사단을 투입했다. 이듬해인 1958년에는 서부 구릉 지대를 벨포르에 넘겨주었는데, 이곳이 지금의 벨포르 아르디아다. 1960~1970년대 고도성장기에 나보레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1960년 약 980만 명이던 인구가 1980년에는 2,000만 명을 넘었다. 전국에서 일자리를 찾아 수도권으로 올라온 사람들과 이민자들이 나보레의 공공임대 아파트에 자리를 잡았고, 1970년대 [[검은 10년]] 동안에는 치안이 불안해진 벨포르를 떠난 중산층까지 더해졌다. 1980년대 민주연합 정부가 세입자 매수권을 도입하면서 공공임대 아파트 일부가 입주자에게 팔렸고, 한때 85%에 이르렀던 공공임대 비율은 지금의 약 71%로 내려왔다. 1990년대부터는 초기에 지은 단지들이 낡으면서 재건축이 시작되었고, 2000년대에는 국가 표준설계 대신 설계공모로 새 단지를 짓기 시작했다. 벨포르의 주거비가 치솟은 2010년대 이후에도 인구 유입은 계속되어, 2023년 나보레의 인구는 약 2,914만 명에 이르렀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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